nardoldol.egloos.com

나르돌돌

포토로그 2014 먼지의 날들





최민화 창고

최민화의 전시를 보았다.
전시가 열리는 합정지구라는 곳은 번화한 홍대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그 느낌은 남루한 곳이다. 세월을 이삼십년 후퇴한 듯한 합정동의 골목길에 마치 양품점의 쇼윈도우같은 디스플레이를 갖추고 있는 방 한 칸 정도의 공간이다. 최민화정도의 활동을 한 작가라면 삐가번쩍한 화이트큐브에 그림이 걸려야 할테지만 한국미술계는 여러가지 이유로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합정지구같은 변두리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삶 속에 푹 박혀 있는듯한 공간에 그림이 걸리는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것도 한국미술의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 되었다.
최민화의 그림을 본 것은 아마 대학때였던것 같다. 그때도 최민화는 분홍색 배경에서 부랑하고 있는 청년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 그림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이십여년이 흐르는 동안 최민화의 그림을 간간히 보았는데 그리 큰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고 때로는 이 작가가 이렇게 사라져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만큼 실망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미술계가 덩치가 커지면서 전보다 많이 팔리고 더 화려해지고 더 많은 수사로 치장되는 시기였던 것 같다. 지난 일요일 최민화의 전시를 보았을때도 그림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슷한 소재를 비슷한 테크닉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몇십년동안 회화를 했으면 그림이 달라졌을법도 한데 내 눈에는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 빠른 세상에 이렇게 느린 그림을 느리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버려진 공터에서 소주를 마시고 기타를 치면서 분홍색 취기에 절은 청년들이 그대로 중년의 어른이 되었고 그 배경은 공터가 아니라 서울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이 그림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새로운 미학이 여기 있어서 이 작가의 회화가 여전히 지금도 어떤 성취를 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 그림을 봐야한 한다고 말할수 있을까?
최민화의 전시를 본 일주일 후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리는 '언더마이스킨'이라는 전시를 보았다. 대기업이 만든 화이트 큐브공간, 중앙에는 서도호의 작품이 영구설치되어있는. 합정지구라는 공간이 강북의 어떤 비장함을 품는다면 하이트컬렉션이라는 공간은 강남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공간일 것이다. 한시간 남짓 전시를 보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우선은 나 자신이 어떤 작업에도 몰입하지 못하고 있었고 영어화 일본어에 밀려 제2외국어 신세가 된 듯한 한국어 대사, 자막, 텍스트마저도 해독하기 힘들었다. 몰입이 힘든 이유는 결정적으로는 작업들에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 작업들은 글로벌하고 노마드하고 무정형적이가 하면 지극히 사적이기도 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듯한 느낌. 흩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전시장의 성격과 작업들의 디스플레이 방식, 그리고 관객들의 옷차림이 만들어내는 묘한 위화감일 것이다. 다시 최민화의 전시로 돌아와서 얘기해보자면 최민화의 그림과 전시장이 만들어내는 어떤 리얼리티같은 것이 하이트컬렉션의 전시를 통해서 역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판은 전보다 복잡해졌고 그것이 뭐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스펙트럼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하나의 진실을 꺼낼 수 있다면 점점 더 자본주의적이 된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미술이 자본화 된다는 것은 상품처럼 된다는 것이다. 백화점의 공간이 과거를 밀어내는 늘 새로움의 신화로 단장하는 공간이라면 지금의 기업의 화이트큐브로 대변되는 미술판은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 몰역사적 공간이다. 새로운 미학을 존재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품으로서 미학을,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상품 속에는 역사성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최민화의 작업같이 삶이, 역사가 손톰에 낀 때처럼 묻어있는 작업은 화이트큐브 같은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림미술관이나 여타의 상업적인 화이트큐브 공간이 보여주는 감각은 아마 '소유하고 싶은 미래'라는 감각일 것이다. 거기에는 역사없음과 공간없음 시간없음이라는 감각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간에서 위화감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관객 각자의 현재성에 있을 것이다. 공간이 더 상업적이건 아니건, 고급미술을 지향하건 아니건 간에 거기서 작동하는 권력의 관계는 다르지 않다.
최민화의 그림은 '소유하고 싶은 미래'라는 감각과는 정 반대의 감각을 보여준다. 그건 아마 삶의 실패를 겪은 자의 이마에 패인 주름살 같은 것일 게다. 최민화는 현실에서 부랑하는 청년들을 그린 이레 여전히 그 부랑의 모습을 조금씩 업그레이드하며 그리고 있다. 그건 그가 느끼는 현실이 본질적으론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겠고 여전히 그걸 그리는 것만이 여기서의 진실이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 작가가 오랫동안 하나의 주제를 버리지 않고 그리고 있다면 그것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동안 최민화의 그림에 대해서 그것을 말하고 묻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최민화의 전시는 젊은 기획자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합정지구라는 신생공간과 젊은 기획자, 그리고 최민화라는 조합은 어떤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것은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삶이 기성의 미술계가 만들어낸 소유할 수 없는 미래를 더이상 쫒지 않겠다는 것이겠고 다른 아버지를, 선생을 발견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리는 잡음들. 단색화, 위작논란, 조영남등. 역시 문제는 기성세대들이다. 


청춘 Gallery

이 그림의 원본은 70년대 후반 장발족 단속에 걸려 바리깡질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을 담은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과 과학기술진흥정책의 파도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이들은 요철발명왕을 읽고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에서 부록으로 주는 조악한 장난감을 수집하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막 청년이 되어 세상에 나왔을때 맞닥뜨린 것은 밝은 미래가 아니라 정신과 신체를 억압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다. 70년대 말 학번인 나의 큰형은 전공인 수의학에는 관심없이 방에 틀어박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페를 혹사하며 담배를 폈는데 아버지는 그런 큰형과 내내 불화하며 볼온서적을 불태우고 기타를 던져버렸었다. 큰형에게 있어 사회의 아버지와 집의 아버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겨우 수의사 자격시험을 통과한 형은 대관령 목장과 제약회사등을 다니다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고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중년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형과 아버지의 슬픔은 단지 가족의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형은 형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터이다. 시대의 비극은 그렇게 가족의 슬픔을 만들어내었다.
장발족 단속이 있은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세상은 조금도 나아진것 같지 않다. 우주왕복을 하고 중력파를 발견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청년들의 머리에는 멍청한 헬멧이 씌워져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주가 더 깊고 멀어진 만큼 우주는 더 멀리 달아난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의 원본은 70년대 후반 장발족 단속에 걸려 바리깡질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을 담은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과 과학기술진흥정책의 파도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이들은 요철발명왕을 읽고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에서 부록으로 주는 조악한 장난감을 수집하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막 청년이 되어 세상에 나왔을때 맞닥뜨린 것은 밝은 미래가 아니라 정신과 신체를 억압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다. 70년대 말 학번인 나의 큰형은 전공인 수의학에는 관심없이 방에 틀어박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페를 혹사하며 담배를 폈는데 아버지는 그런 큰형과 내내 불화하며 볼온서적을 불태우고 기타를 던져버렸었다. 큰형에게 있어 사회의 아버지와 집의 아버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겨우 수의사 자격시험을 통과한 형은 대관령 목장과 제약회사등을 다니다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고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중년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형과 아버지의 슬픔은 단지 가족의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형은 형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터이다. 시대의 비극은 그렇게 가족의 슬픔을 만들어내었다.
장발족 단속이 있은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세상은 조금도 나아진것 같지 않다. 우주왕복을 하고 중력파를 발견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청년들의 머리에는 멍청한 헬멧이 씌워져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주가 더 깊고 멀어진 만큼 우주는 더 멀리 달아난지도 모르겠다.'

4월 25일의 작업실 작업중

긴 여행을 다녀오고 다시 작업을 시작한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처음에 잡히지 않던 붓이 이제는 점점 익숙하게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그리던 것을 그리고 있지만 전보다 더 더디고 힘든 방법으로 그리고 있다.
날이 갈수록 눈은 어두워지는데 아이러니하게 그림은 더 밝은 눈을 요구한다.
어디론가 가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그린다.

전시소식 창고

SWEET MY HOME




김서율_민경숙_이주은_정재호展
  

2016_0331 ▶

 2016_0424


응시_한지에 아크릴채색_74×94cm_2016

초대일시 / 2016_033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2014. 갤러리 현대 <먼지의 날들> 월간미술 리뷰 평론



정재호  __  먼지의 날들

갤러리 현대 5.30~6.22

최근 새롭게 행동주의미술이 주목받으며 미술가들이 사회, 정치, 경제분야를 두고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행동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 매체를 사용하는 미술은 낡은 것이며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우리는 세계 미술사에 남을 ‘민중미술’ 전통을 지니고 있고 그 의의와 영향력은 여전히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를 거치며 겪은 ‘단절’ 이래 사회·역사적 이슈를 담은 작업은 일면 진부한 듯 여겨져 그 내용은 뒤로 밀리고 작가의 이름이 작업을 덮어버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재호의 회화 업은 행동주의미술과 민중미술적 태도와 닿아 있다. 허물어져버린 오래된 아파트와 건물들의 정면을 몸으로 기억하려는 듯 세밀하게 묘사한 일련의 작업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사물의 현재를 기록하는 안간힘을 보여줬다. 커다란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건물 창은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고, 그 창을 사용했던 개개인들의 삶을 환기하게 만든다. 결국 오래된 건물을 화면으로 옮기는 작업은 오랜 시간 그곳을 장소로서 사용했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정재호는 그리는 행위를 통해 온전히 체화하며 구체적 실존을 화면에 옮기는 시도인 것이다.
이렇듯 건물 파사드를 다룬 인상적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가 ‘먼지의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사물과 인물, 상황 등을 그린 작업을 전시했다. 그가 그린 것들은 불이 붙은 채 덩그러니 놓인 타자기, 무채색의 카메라, 종점에 모인 전차들, 공항으로 쓰였던 황량한 들판에 놓인 프로펠러 비행기, 오래된 텔레비전, 그레이하운드 버스, 우주선과 외계 행성에서 헬멧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소변을 보는 듯한 남자들, 영화 포스터에 나올 법한 여인의 초상,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를 지녔던 인천 선인체육관 등 대부분 1960~1970년대의 흔적을 담은 것들이다. 화재로 연기가 오르는 홀리데이호텔 이미지와 버려진 차들,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단지 내 풀이 무성한 공터에 놓인 미끄럼틀과 시소 등은 모두 빛바랜 과거의 이미지다. 전시 서문을 쓴 정현은 “정재호에게 과거의 호출은 추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워지거나 잊혀진 기억의 잔해들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해 재현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과거 개발 시대 선진적 삶의 상징이었던 대상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해 정재호는 그리기라는 신체적, 물리적 활동을 매개로 대상을 기억하고 다시금 제시한다. 다시 말해 과거 대상에 대한 ‘그리기’는 ‘기억하기’라는 행동과 다름 없으며, 스스로 기억한 대상을 회화의 형식을 통해 재제시(re-presentation)하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객들은 그가 겨우 붓끝으로 잡아놓은 빛바랜 이미지들의 마법에 기꺼이 빠져든다. 바스러질 듯한 무채색 화면으로 섬광 같은 공감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정재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를 담지한 과거의 사물 이미지는 전시장을 나선 후 위력을 발휘한다. 마주치는 도심의 마천루와 거리는 주술에 걸린 듯 지상으로부터 몇 미터 떠 있는 듯하다. 선인체육관이 ‘먼지처럼’ 사라졌듯 우리를 둘러싼 단단한 현재와 사물들도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닐까. 이것이 미래를 주장하는 장밋빛 수사들의 속임수와 ‘현실’을 둘러싼 장막이 폭로되는 순간이라면 이토록 견결한 행동주의가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서준호・스페이스 오뉴월 대표



2014 먼지의 날들 Gallery

불꽃 Flame_ 2012_ 한지에 아크릴_ 79 x 120cm





귀환 Return_ 2012_ 한지에 아크릴_ 80 x 123cm





그레이하운드 Grayhound_ 2012_ 한지에 아크릴_ 79 x 121cm





구조 Structure_ 2012_ 한지에 아크릴_ 80 x 123cm





발명왕 Inventor_ 2012_ 한지에 아크릴_ 81 x 123cm





청춘 Youth_ 2012_ 한지에 아크릴_ 78 x 121cm





상자 Box_ 2012_ 한지에 아크릴_ 81 x 123.5cm





콤플렉스 Complex_ 2012_ 한지에 아크릴_ 79 x 123cm





세대 Generation_ 2012_ 한지에 아크릴_ 80 x 123cm





( 구멍 Hole_ 2013_ 한지에 아크릴_ 80 x 120cm





가면극 Masque_ 2012_ 한지에 아크릴_ 80 x 121cm






Again_ 2012_ 한지에 아크릴_ 80 x 120cm





소나기 Shower_ 2012_ 한지에 아크릴_ 79 x 122cm





홀리데이 호텔 Holiday Hotel_ 2012_ 한지에 아크릴_ 77 x 118cm





새벽 Dawn_ 2012_ 한지에 아크릴_ 80 x 120cm





트랜지스터 Transistor_ 2014_ 한지에 아크릴_ 88 x 104cm







경야 Wake 2014 한지에 아크릴릭 194x130





무게 Weight_ 2014_ 한지에 아크릴_ 135 x 95cm






대화 Conversation_ 2013_ 한지에 아크릴_ 135 x 200cm






발화 Writing_ 2013_ 한지에 아크릴_ 150 x 210cm






타워 Tower_ 2014_ 한지에 아크릴_ 180 x 180cm







휴일 Holiday_ 2014_ 한지에 아크릴_ 160 x 227cm

현재의 폐허, 오래된 미래"파리는 변하지만 도무지 나의 우울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 지은 궁전도, 새로 놓인 판자와 벽돌도, 오래된 교외도, 모두가 내게는 알레고리가 된다. 내 소중한 기억이 바위보다 무거울 동안은." (샤를르 보들레르, 백조,『악의 꽃』중에서) /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이다." (김애란, 침묵의 미래 중에서) 부서진 문장의 몽타주 ● 의수, 모닥불, 낡은 건물, 놀이터, 불시착한 비행기, 잠수정, 여인, 청년, 소녀, 우주선, 타자기, 전화기, 텔레비전 수상기, 라디오,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전차역 등. 정재호가 재현한 대상들은 마치 부서진 문장처럼 흩어져 있다. 회화 속 사물, 인물, 장소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까? 그것은 기호인가? 상징인가? 퍼즐은 쉽사리 완성될 것 같지 않다. 정재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기억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고 기록물 속에 잠들어 있는 (혹은 대중 매체의 기사로 고정된) 박제를 꺼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그에게 재현은 의미 있는 모방이라기보다 재현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된다. 그가 선택한 이미지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산물이거나 아직 남아 있으나 거의 폐허가 된 장소들 또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장면들로 대부분 독재와 개발 시대에 존재했던 것들이다. 강력한 군사 정권 주도하에 이룩한 급진적인 산업 개발은 고속도로, 산업단지, 아파트단지 건설로 이어졌고 국토는 경제 성장을 위한 물질로 전락하고 말았다. 산업화의 욕망은 울퉁불퉁하고 제멋대로인 자연을 반듯하고 평평한 개발을 위한 기지로 바꾸었다. 독재적 상황 속에서 융성한 발전의 희망은 시민의 정신적 성장을 거세하듯 생명으로서의 땅도 제멋대로 잘라내었다. ●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기까지 우리는 권력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해야 했고 당시에는 그것이 최고의 선이었다. 세기가 바뀌고 한국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자 과거가 부끄러워졌을까? 난개발로 훼손된 도시 경관을 바꾸기 위해, 더욱 쾌적한 삶을 위해, 좀 더 안전하고 위생적인 일상을 위해 도시는 다시 몸살을 앓아야만 했고 아직 우리는 완쾌되지 않았다. 개발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건축적으로나 거래의 가치로써 개발의 논리는 더 빨리 더 많은 건물을 지어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는 문화의 자긍심과 역사를 재해석한 신화적 세계를 복원하기 위해 매달린다. 둘 다 기억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 나는 정재호가 재현한 대상들이 무엇을 지시하는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보다 그가 바라보는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운명에 놓인 것들, 그리고 근대의 잔해물 가운데 용케 살아남아 황학동 변두리에서 구원한 사물들에 대한 집요함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했는지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는 지속해서 근대의 흔적을 추적하고 수집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흔적들은 익히 잘 알려진 탈 시간적인 기념비가 아니라 시간의 유속에 하염없이 부유하고 결국 부식되거나 부패한 것이 대부분이다. 초기에는 주로 인천, 서울에 남겨진 근대 아파트나 건물들을 주제로 삼았고 이번 전에서는 온갖 기록물, 대중 잡지, 초기 영화 포스터에서 추출한 가까운 과거, 그러나 잊혀진 기억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심지어 황학동에서 구입한 근대적 기계(타자기, 전화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어진다. 그는 2005년 전시 도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서울은 끊임없이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한다. 매일 진행되는 이런 부정의 공사 속에 오래된 것들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새로운 도시의 매끈한 표면에 스며들지 못하는 기억들은 그래서 누락된 도시의 틈 사이로 파고든다." 이 글은 회연 시범아파트에 관한 단상으로 그의 문장이 건네는 사유는 발터 벤야민이 근대의 수도에 대한 연구를 연상시킨다. "'파사주 프로젝트'를 통해 벤야민은 진보, 계몽과 새로움이 자신을 소란스럽게 주장할 때, 신화적 형태와 강제적 반복을 발견하기 위해 현대성의 심장부에서 원형적이고 고대적인 것의 흔적을 추적한다." (그램 질로크,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효형출판, 2005, 211) 역사라는 꿈에서 깨어나기 ● 발터 벤야민이 독일 바로크 비극을 사유의 기원으로 상정한 이유는 당시 기존의 유럽 문명을 관통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주변 국가와 달리 독일은 봉건적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하였기에 고전주의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의 바로크 낭만주의 비극은 그리스 비극이 폐허 속에서 영생의 구원을 지시하는 신화적 알레고리와 달리 죽음 그 자체를 제시한다. 벤야민이 근대도시에 관한 관심을 두게 된 이유 역시 독일 바로크 비극의 세계관과 연결된다. 그는 르네상스 이후 개인의 주체 의식이 점차 강해지면서 이른바 계몽주의에 의해 개인성이 강조되는 사회현상이 대도시의 탄생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대도시는 개인의 꿈과 욕망으로 채워진 환영(phantasmagoria)이 되었고 이 같은 꿈 풍경으로서의 대도시는 진보라는 환상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의 환상으로 구성된 도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등장하지만, 역설적으로 늘 동일한 상태가 반복된다. 다시 말해 유행으로 상품은 늘 새로운 상품으로 대체되지만 사회 구조는 여전히 특정 계층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은 신화에 기반을 둔 역사를 반복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구성된 역사의 환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벤야민은 시간을 거슬러 간다. 그가 "계곡물이 충돌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자연 현상을 비유한 것은 바로 시간의 방향을 역행한다는 의미로서 마치 소용돌이처럼 관습화된 질서 사이에서 문득 나타나는 섬광 같은 깨달음으로부터 역사를 다시 쓰는 것과 같다. 벤야민에게 19세기 말 욕망으로 채워진 대도시에서 자각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버려진 사물이다. 그는 이 버려진 사물의 '삶 이후의 삶'을 조명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대상은 상품, 도시 내의 상품 생산 과정과 교환, 소비를 탈 물신화하고 탈 신화화한다. (…) 대상의 '참된 내용'은 소멸할 때 나타난다." (위의 책, 224-225)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신화를 생성하기 위함이 아닌 현재로부터 과거가 만나는 순간, 섬광이 빛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이중적이다. 섬광의 찰나는 현재 속에서 과거를 비추는 일시 정지된 변증법적 시간이자 자각의 경험을 선사한다. ● 벤야민이 바라본 소멸을 위한 소비의 끔 풍경 대도시는 한국의 현재와 닮았다.「파사주 프로젝트」는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파사주'는 안과 밖이 섞인 공간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변증법적 공간이었지만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의 관심 밖으로 내몰린다. 파사주는 현재형의 유물이자 폐허와 다르지 않다. 효용 가치가 사라진 사물, 건물, 장소를 되찾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시도는 혁명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미가 파괴된 유물은 연속성으로서의 역사를 교란하기 때문이다. 되살린 장면들 ● 현실은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낡은 기억의 흔적과 그 사이를 비집고 끼어든 동시대의 가치를 반영하는 대상이 혼재하는 복수의 시공간이다. 현재란 다양한 과거의 흔적들과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힘이 한데 섞여 있다. 전진만을 추구하는 권력의 바람은 일상을 쉼 없이 바꾸는데, 변화의 주기가 점차 가속화되면서 과거는 수면 아래로 침수되고 그 빈자리에는 장소의 기억과는 무관한 것들이 자리를 잡는다. 도시는 끊임없이 변하는 적자생존의 생태계로 이루어지는 기억의 몽타주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중에서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신화적 상징체들이 존재한다. 이와 반대로 기억을 대표하는 표상의 자격을 갖지 못한 채 이름 없이 남겨진 것들이 있다. 정재호는 화가 이전에 한국의 근대사를 조사하는 추적자이다. 그는 정부 간행물, 낡은 잡지들, 영화 포스터, LP 디스크, 황학동의 골동품 등과 같이 기록물부터 버려진 사물까지를 샅샅이 뒤지면서 조작되거나 은폐된 역사, 지워지거나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장소를 찾는다. ● 가속화된 동시대 한국의 도시는 과거를 지우면서 동시에 복원한다. 지워지는 과거는 익명의 장소들로 사회적 의미보다 개발에 의한 유토피아의 환영을 좇는 자본으로서의 가치만을 가진다. 반대로 복원되는 과거는 '역사적 이념적 의미'를 갖는 장소다. 그렇다면 중심에서 이탈한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은 지워지지도 않지만 복원되지도 않는 폐허에 가까운 장소일 것이다. 이곳은 존재하지만 잊혀진 장소, 사라지지 않았으나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곳이다. 타이프라이터, 다이얼 전화기, 한복 입은 여인, 교복 입은 소녀, 의수, 우주선, 잠수정, 구식 텔레비전 수상기, 낯선 곳에 불시착한 것처럼 보이는 비행기, 엉켜 있는 전차들, 그레이하운드 버스, 폐허가 된 건물 등. 정재호의 회화 세계에 초대된 이미지들은 서로 무관한 듯 보인다. 우주선, 비행기, 헬멧을 쓴 네 남자의 뒷모습은 초현실주의적 세계를 연상시키고, 정물화라 부를 수 있는 낡은 사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보색으로 그려진 다소 예스러운 인물화는 키치에 가깝게 느껴진다. 무채색에 가까운 낡은 건물과 붕괴 중인 건물의 연기는 초현실주의적 환상을 더욱 부추긴다. ● 정재호가 수집한 기억의 이미지들은 단절된 역사의 흔적이자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욕망으로 구성된 자본주의 세계의 스크린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새로운 것은 유행의 질서에서 벗어난 대상들을 무참하게 폐기 처분한다. 예를 들어「타워」(2014)는 2013년에 완전히 철거된 인천의 선인 체육관의 건물 일부의 모습이다. 선인 체육관은 군부독재 정권의 잔여물이었다. 1970년대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로 불리던 이 부풀어진 자의식의 건물을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역사의 청산이라 불러라 할 것인가? 아니면 신화의 되돌이표라 불러야 할까? 이번 전시에서 정재호가 호출한 가까운 과거의 유적과 현대의 유물은 1960-70년대 한국이 집단으로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잔해들이다. 만화가 윤승윤(1943-)의 "요철 발명왕"의 한 장면을 추출한「발명왕」, 4.19의 기념하는 모닥불을 그린「불꽃」, 1971년 성탄절에 일어난 대연각 호텔 화재를 소재로 한「홀리데이 호텔」,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여배우 '문희'를 그린「어게인」, "하얀 나비"를 히트시킨 요절 가수 김정호를 그린「나비」등은 기록물에서 찾은 박제된 기억들이다. 언뜻 보면 향수를 자극하는 '추억 팔이'처럼 보이지만 정재호에게 과거의 호출은 추억을 재현하는 게 아니다. 추억은 기억을 없애는 행위이다. 그는 지워지거나 잊혀진 기억의 잔해들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해 재현을 선택한다. 벤야민이 역사의 흔적들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한 것처럼 정재호가 수집하고 추출한 기억의 이미지는 맥락을 재구성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의 파편들을 공간에 위치시켜 관객이 스스로 기억의 몽타주를 완성하게 될 것이다. 이는 객관적 기록에 바탕을 두고 재현된 이미지들과 관객의 주관적 경험과 기억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유도하고 있으며 이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우연한 경험과 마주하는 '마법적 순간'을 누군가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자각에 의한 역사의 생성은 거대 역사가 아닌 주어진 세계와 자아가 서로 부딪혀 만들어지는 섬광의 순간이자 또한 다원주의라는 환영을 투사하면서 실제로는 일원적 방향성으로 나아가는 역사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저항의 예술적 실천이기도 하다. ■ 정현


풍경의 맨얼굴 창고

경기도 미술관에서 본 안경수 작가의 그림을 보았다.
남루한 풍경들이다. 서울의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류창고와 컨테이너,송전탑, 잡풀이 우거진 들판, 버려진 건물들을 그린 150호의 연작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려진 대상은 남루하나 그림은 남루하지 않다. 오히려 거대한 전시장을 압도한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남루한 것을 그린 그림들이 현대미술의 전당이라 할 공간을 이겨낸다. 원래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현대'와 '세련된'것이 들어와야 직성이 풀리는 공간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감각의 위계가 있다면 그 위계는 자본과 정치에 의해서 메겨질 것이다. 위로 갈수록 향유될 것이고 아래로 갈수록 버려질 것이다. 버려지는 것들의 목록은 남루한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싸구려 조립식 건물, 낡은 집, 똥개, 쓰레기, 잡초, 한글간판 같은 것들이 아마 그 목록에 들어갈 것이다. 그것들은 돈 냄새가 나지 않는다. 더불어서 그것들을 그린 그림도 돈 냄새가 나지 않는다. 누가 '김밥나라'라고 쓰여진 간판을 그린 그림을 사겠는가.
안경수가 그리는 풍경은 그 남루한 것들이 총 집결해 있는 장소들이다. 녹슬고 얽고 흘러내린다. 잡풀이 우거지고 쓰레기들이 버려져 있다. 그리고 그 위로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분진이 날린다. 과연 이걸 팔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이게 그림의 대상이 되기는 하는 것일까? 
내 작업실이 있는 곳도 바로 그런 곳이다. 나는 이 동네를 쏘다니면서 보이는 그 풍경들에 대해 '과연 저것이 그림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꽤나 잘 그린다는 작가의 그림들은 대부분 그 반대의 지점을 그리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 '저곳'의 풍경을 그리거나 여기를 저곳처럼 그려야 하는 불문률이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여기의 풍경을 그려야 한다는 의식있는 화가들조차 여기의 질감과 색으로 그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의 그림은 외국작가 L을 연상시키고 또 누구의 그림은 P를 연상시키고, 또 다른 그림은 G를 연상시킨다. 목록에는 T도 있고 M도 있다. 아마 알파벳 모두에 해당될 것이다. 이 사태는 사실은 익숙한 것이다. 지필묵으로 천년을 그린 후에야 금강산과 인왕산을 있는 그대로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류의 리얼리즘 회화는 사실 돌파해야할 것들이 매우 많다. 많은 화가들은 대상을 다르게 그림으로서 그것을 돌파한다. 하늘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구식 변소를 꼭 그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화가는 그 색을 바꿔서 그것을 볼만한 것으로 만들어왔다. 그런데 그 냄새나는 화장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남루한 것을 남루한 것으로 그려내는 것은 의외로 쉽지가 않다. 그림은 감각의 위쪽을 지향해야 하기에 감각의 아래쪽의 것들은 외면된다. 그래서 늘 리얼리즘 회화는 공평하지 않았다. 아주 간혹 몇몇의 화가들에 의해 겨우 그 아랫쪽에 대한 전통이 이어질 뿐이다. 
안경수의 그림이 옮겨내는 것들에는 감각이 충만하게 차 있다. 산다는게 사실은 비루한 것이고 가끔 반짝일 뿐이라는 걸 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감각은 결코 특별한게 아니다. 흔하게 널린 것들이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안경수가 그린 것들을 그렇게 그린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화가들은 낮은 것을 그릴 때 조차도 똑똑하게 회화를 하느라 갖은 알리바이를 동원해왔다. 그렇게 그 풍경들에 대한 진짜 감각들을 늘 외면되어 왔다. 
감각중에 가장 두려운 감각이 있다면 그건 아마 타인에 의해 포착된 나의 얼굴과 목소리에 대한 것일 것이다. 대비할 새도 없이 진짜 내가 엄습했을때 내가 보는 것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나의 컴플렉스이다. 자, 보라구. 이 배치와 질감이 바로 너야. 라는 것이다. 안경수가 남루한 풍경을 그리면서 남루함이라는 지루한 감각을 돌파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그 그림이 그려내는 장소는 자신의 맨얼굴 처럼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사실 물류창고나 송전탑, 그리고 쓰레기와 똥개는 우리의 맨얼굴이 아닌가.

몰락하는 장소와 그림 창고

12시 이전에 자면 새벽에 꼭 잠이 깬다.
어제는 북서울 미술관에서 '강북의 달'이라는 전시를 오픈했다. 서울의 강북의 역사와 삶, 지역성 등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나는 예전 2005년 작품과 최근 작품 2점을 출품했다. 같이 참여한 작가들은 모두 전에 알고 있었던 작가였는데 한 작가는 처음 보는 작가였다. 강북의 월계동 지역의 경관을 유화로 그린 작업이었다. 다소 올드해 보이는 스타일이었고 나쁘게 보자면 미학적으로 게으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작가는 아마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과 삶에 관심이 더 컷을 것이다. 그림은 매우 성실하게 잘 그려졌고 이른바 '강북성'을 잘 드러내는 톤과 붓질로 세심하게 조율되어 있었는데, 현대미술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벗어버린다면 충분히 감동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현대미술이 스타일과 새로운 해석을 중요시한다면 이런 그림들은 작가가 보는 진실을 넘어서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해석이 허용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쪽이 좋은가? 아니면 옳은가?
한때 나는 미학적으로 게으른 작업은 나쁜 작업이라는 말을 믿었었다. '정주'보다는 '유목'이 좋은 것이고 '로컬'보다는 '코즈모폴리탄' 한 작가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목과 코즈모폴리탄은 자본과 서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 한다. 애가 딸리고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은 로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정치가 모든것을 압도하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을 목도하는 지금 유목이니 하는 태도들이 마치 전국시대를 피해 산으로 바다로 이국으로 은거하는 태도로 보인다. 
강북이라는 말에는 추레함이 묻어난다. 그 작가가 그린 그림중엔 1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풍경을 그린 두 점의 작품이 있다. 풍경은 변함이 없다. '강북성'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변화하지 않고 낙후되어 있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철거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곳에 정주하려는 작가의 그림에는 그것때문에 생기는 비애감 같은 것이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를 말한다. 결국 실패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작가는 거기 있을 수 밖에 없다. 정주하지 않는 작가가 몰락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다. 반대로 정주하는 작가가 몰락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공동체적인 것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성을 위해 생각의 단추를 그렇게 껴 보는 것이다.

유령의 회화 창고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라는 소설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지 못했다. 아니 못 읽을 것이다 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20세기에 쓰여진 완독하기가 가장 어려운 문학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경야(經夜)라는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경야'는 죽은이를 장사지내며 밤을 새우는 일을 말한다. 지난 6월에 있었던 개인전의 막바지에 작품들의 제목을 지으면서 문득 이 소설의 제목이 떠올랐다.
그 그림은 안국동에 있는 한 오래된 건물을 그린 것이다. 낡았기도 하거니와 전혀 관리한 흔적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그 건물은 신기하게도 3층까지의 건축양식과 4층 5층이 다른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5.16 이후 대통령직을 물러난 윤보선을 감시하기 위해 기존의 건물을 증축하여 올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죽은이를 장사지내기 위해 경야 하듯이 정치적으로 죽은 이를 경야하기 위해 이 건물을 올린 셈이다. 도시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이렇 듯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죽은 자의 일이 말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될 것이나 그럴 수 없다면 그건 전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설이 된 이야기는 역사가 된 이야기 보다 강력하게 살아남아서 현재를 떠 돈다.
나는 주로 밤을 세워서 그림을 그린다. 이번 그림들은 6,70년대를 다룬 것들인데 그렇다면 나는 그 시대에 대해 경야한 셈이다. 회화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 일 수 밖에 없다. 회화의 태도는 그래서 과거라는 죽음의 상태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이기도 하다. 어떤 회화는 죽은 것을 영원히 과거의 것으로 봉인하는가 하면 어떤 회화는 죽은 것을 끊이없이 현재로 불러내기도 한다. 그건 유령의 회화이다.  


먼지의 날들 창고



먼지의 날들

갤러리 현대 본관

5. 30-6. 22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