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돌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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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마이가든


2011-혹성 Gallery

4April 182×227 한지에 아크릴릭, 2011


의수 Artificial Hand 57×41 한지에 아크릴릭 2011


원호 relief 130×194


Juice


심장 Heart 162×227 한지에 아크릴릭, 2011



크리스마스타운  Christmas Town,162×227 한지에 아크릴릭, 2011



파랑새 Blue Bird 112×162



한남동 Hannamdong, 112x194, 2010


Message

콤플렉스 Complex 175×260 한지에 아크릴릭, 2011




귀환


Moon 130×194


브리핑 Briefing



어떤 날 Someday 91×117 한지에 아크릴릭 2011


 


2009 아버지의 날 Gallery



California 194x259 Acrylic on paper 2009


Dom I 182x227 Acrylic on paper 2009

Dom II 182x227 Acrylic on paper 2009


International 162x227 Acrylic on paper 2009

무진 Mist 175x259 Acrylic on paper 2009

종점 Last Stop 162x227 Acrylic on paper 2009

새장 Birdcage  91x117 Acrylic on paper 2009

몽유 Dream Walking 112x162 Acrylic on paper 2009

USIS 112x162 Acrylic on paper 2009

Press 200x182 Acrylic on paper 2009

믿음의 건축 Architecture of Belief 130x194 Acrylic on paper 2009

백일몽 Daydream 182x227 Acrylic on paper 2009

신촌 New Town 130x194 Acrylic on paper 2009

역 Station 130x194 Acrylic on paper 2009

폐허들-은행 Ruins-Bank  180x200 Acrylic on paper 2009

휴가 Leave 91x117 Acrylic on paper 2009

혁명가 Revolutionary 91x117 Acrylic on paper 2009

지지자들 Supporters 91x117 Acrylic on paper 2009
약속 Promise 112x162  Acrylic on paper 2009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대범 (미술평론가)

 

우리는 우리가 찾아가는 집에 도착했다.

세월이 그 집과 그 집 사람들만은 피해서 지나갔던 모양이다.

주인들은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 김승옥, 무진기행중에서

 

 

오래된것은 대체로 자연스럽게 잊히는 법이지만, 개중에는 잊히지 않고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현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대상으로 한 작업에서 작가들이 쉽게 기대는 지점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과잉 감정 이입으로 발생하는 막연한 낭만적 향수이다. 이러한 낭만적 향수는 달콤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매우 위험하다.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필연적인 편견은 무모한 개발 논리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무모한 개발 논리에 악용되는 묘한 상황을 야기한다. 결국, 낭만적 향수라는 달콤한 포장은 문제를 총체적으로 통찰하지 못하게 한다. 청계천이 그러했으며, 황학동이 그러했으며, 근자에는 숱한 뉴타운 건설 현장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러하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지금까지도 우리 귓가를 떠나지 않는 포크레인 삽질 소리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모순적 시선이 따르기 마련이다.

 

다큐멘터리와 초현실의 사이에서

오래된(혹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낭만적 향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자세로 감정이입 자체를 배제해야한다는 전제 하에 첫째, 대상을 객관적 존재(삶의 부박한 실재를 누출하는 것이 아닌)로 바라보거나, 둘째, 대상을 현실 세계에서 초월시켜 환상적 세계에서 재인식해야 한다. 정재호는 그간의 작업에서 잊히지 않는, 잊힐 수 없는 것을 찾아 현재와 과거의 내밀한 길항 관계를 반복적으로 추적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현재를 대변하는 인간의 보다는 인간(현재)과 유령(과거)이 공생하는 삶의 체취이다.

정재호는 이렇게 획득된 대상을 객관적 존재로 바라보거나, 환상의 세계에서 재인식하면서 자신의 회화적 완결성을 구축했다. 오래된 아파트(금호미술관, 2005)에서는 1970년대 광폭한 개발의 산물인 시민 아파트를 다큐멘터리 접근법으로 조사관찰해 객관적 존재로 다루었으며, 황홀한 건축(관훈갤러리, 2007)에서는 단층 주택을 중층적으로 쌓아올려 초현실적 집적물로 재구성했다. 그렇다고 각각의 개인전에서 한 가지 방법론으로만 일괄한 것은 아니다. 어디에 무게 중심을 두는 지는 다르지만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큐멘터리 접근초현실적 접근은 그의 작업에서 상호보완적이다.

정재호는 현실이라는 자료를 철저한 조사를 통해 배면에 깔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회화 자체가 참혹함을 참혹함으로 그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회화가 사실적으로 대상을 재현하다고 그 대상이 현실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 역시 아니다. 또한 현실을 리얼하게 제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현실의 맥락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선, 그의 작업에서 현실이 직접 드러나는 것은 <회현동 기념비>, <대성 맨션>, <천변 호텔>, <청계 타워>, <창신 타워> 등의 작품 제목과 사실적 묘사에 기반을 둔 건물의 구조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오히려 현실의 맥락을 훌쩍 벗어난다. 단층 건물이 <적산 타워>, <현대오락장>에서처럼 반복 혹은 집적하여 거대한 몸집으로 구축하거나, <오래된 아파트> 연작에서처럼 가시적 세계에 비가시적 세계가 절충한다. 이러한 태도는 골기(骨氣)’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즉, 사진이 포착한 가시적인 표면의 재현이 아니라 표면에 스며든 삶의 체취를 포착한 것이다.

 

아버지의 날, 그리고 나의 날

프로이트에 의하면, 사소한 말실수든 보다 심각한 증상이든 반복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다. 오래된 아파트, 황홀한 건축에서 정재호는 오래된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법한 대상이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정재호는 오래된대상 그 자체보다는 그것들의 삶의 체취에 방점을 둔다. 그렇다면 정작 그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것은 오래된대상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기거하며 체득한 그들의 삶의 체취이다. 이번 아버지의 날은 그간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그러나 현실에 중심을 두면서 다소 부가적으로 사용했던) ‘삶의 체취를 전면에 드러낸다.

이번 전시 작품의 근간은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기록 사진이다. 일본식 건축물인 조선은행 군산지점, 625의 상처를 간직한 노동당사의 벽면, 평양 시내, 취재를 위한 경비행기, 1공화국 선거,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19805월의 전남도청, 실미도, 신촌역, 동두천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얼개에서 선택한 사진이며 그것들은 과거에는 존재했으나 현재는 사라진, 그럼에도 현실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유령과 같은 이미지이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현실에서 훌쩍벗어난다. 이전 작업들과 다르게 제목도 특정 대상을 지시하지 않으며, 화면 역시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요소는 삭제했다. <지지자들>에서 철교에 걸려 있는 선거 플랭카드의 텍스트를 지웠으며, <종점>의 건물은 실미도 군인들이 탈취한 버스가 마지막으로 멈춰서 자폭했던 유한양행 건물이지만, 그 이름 역시 지웠으며, 취재용 경비행기를 그린 <새장>에는 신문사의 로고를 지우고, 비행장을 폐허로 만들었다. 1980년 계엄군이 점령한 전남도청을 찍은 사진에 기반을 둔 <휴가>에서는 계엄군이 지워지면서, 모호한 시간대를 지시한다. 더 나아가 그 사진과 관련이 없는 다양한 요소(사진과 다른 시간대의 이미지, 사진과 다른 공간의 이미지, 그리고 작가의 상상력)를 통해 재조합한다. 국제적인 것의 동경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화문 국제극장 사진에 기반을 한 <인터네셔널>에는 사라진 건물을 복원하고 전후 불안한 시대상을 담은 <오발탄>과 국제극장의 마지막 상영작인 <사막의 라이언>을 한 화면에 담았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실제 동두천의 건물과 한국전쟁의 이미지, 그리고 최근 동두천에서 발생한 사건 등의 이미지를 한 공간에 중층적으로 다룬다. 이와 같이 이번 작품은 그저 특정 시간과 공간을 단순히 유추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 정보만이 남아 있는 모호한 공간이다. , 화면의 시공간은 특정 재현물이 아니라, 기억을 환기시키는 장치이다.

아버지의 날은 모호한 시공간을 폐허로 제시한다. 그것은 마치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며 위안과 불안이 교차했던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무진의 특산물 안개와 유사하다. 무진기행의 안개는 이승의 한()을 품은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같은 것으로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 그러기에 안개는 아무리 헤쳐나가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위력을 지닌다. 답답하고, 단조로운, 그리고 벗어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무기력한 혼돈이 아버지의 날전체에 드리워져 있다. “기억하지 않는 공간, 기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공간, 또는 끊임없이 기억을 삭제하려는 의도 속에 더 이상 아버지들의 언어는 기거할 곳이 없어졌다.(작가노트)”는 작가의 말은 (아버지의 언어뿐만 아니라) 자신의 언어를 상실한 자괴감에 찬 작가의 고백으로 들린다. 1960년대 윤희중이 겪었을 한국사회의 혼돈과 불안에서의 무기력과 부끄러움이 2009년 정재호에게 중첩된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날은 지금 여기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버지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내뱉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밤늦게잡설 wkqeka

블로그의 주소명을 다시 옛날로 되돌려 놓았다.
그동안 링크를 시켜놓은 이들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블로그에 의야했을 것이다.
주소가 돌아왔다고 다시 이 곳을 찾을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일요일인데 학교에 가서 사람을 만나고 술한잔 걸쳤다.
주량은 진짜 술 한잔 이다.

술을 깨려고 학교에 돌아가서는 야작하는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또 습관데로 강의모드로 돌변하고 말았다.
일요일 11시에 나타나서 강의하는 선생.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오래간만에 내 블로그를 다시 훓어보았다.
이런, 꽤 재밋군.

그래서 다시 블로그를 하기로 했다.
그동안 이곳을 포스팅하던 나름의 팬들도 모두 떠나갔을테니 부담이 없다.

부담없이, 그냥, 천천히.


졸업미전 wkqeka

졸업미전 시즌이다.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들속에는 4년간의 삶이 담겨있다. 작품들은 그 삶의 절실함과 어쩔수 없는 저마다의 한계의 표현이다.
누구의 작품은 호평을 받고 때로는 외부전시에 낙점을 받기도 하며 또 누구의 작품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체 일주일간을 걸려있게 된다. 학생들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내기 위해 분주하다.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미술계는 그리 넉넉하지 못할것이다.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낸다고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담담하기는 또 어려울 것이다.

졸업미전 뒷풀이를 하면서 남아있는 학생들과 새벽까지 얘기를 했다.
그들의 말 속에는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보다는 앞날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다.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은데 현실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의 성과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아는 학생조차도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서 취업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말을 해줄 수 있는 것인가?

오랜만에 학과 클럽에 들어가서 학생들의 사진을 들춰보았다.
아, 1학년때는 이런 얼굴들이었구나. 아무것도 모르는것 같아 보이는 순박한 얼굴들이 이렇게 변한 거구나. 
사진을 보면서 그들이 4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서 이걸 그려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마도 그들이 온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거기다가 이런저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졸업미전을 하는 학생들에게 그래서 진짜 필요한 것은 그들의 그림을 더 잘 보아주고 그 이야기를 든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림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밥도 사주고,
조금 더 유치하게, 조금 더 통속적으로.


교육

교사의 무지는 학생의 모든 가능성을 덮는다.
절실하고 무서운 말이다.

유령의 회화

유령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유령은 흔히 공포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공포는 유령의 무서운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타남 자체에 있다. 유령의 현현으로 인하여 현재는 더 이상 과거와 단절된 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망각의 기재를 무너뜨리는 것. 만일 그 망각의 기재가 독점되어 있는 것이었다면 유령의 현현은 어떤 이에게는 반가운 것이기도 하다. 그린다는 행위는 언제나 그려진 대상을 과거에 남겨 놓는다. 그래서 재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과거의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 화가가 어떤 대상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보다 적극적인 목적을 위해 구조화시킬 때 화가의 그림은 재현을 넘어서서 다른 어떤 것이 된다. 때로는 그것은 과거의 것을 이곳으로 소환한다. 유령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을 때 어떤 화가는 그림을 통해 그 유령을 불러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생각해볼 것이 자기 스스로 현현하지 않은 유령을 이곳에 데려왔을 때 단지 덩그러니 놓여있게 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내 그림의 문제이다.


개인전 Gallery


마파두부

토요일 아침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하루종일 컴퓨터앞에 앉아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읽었을 때도,
애들을 재우고 늦은 시간 홍대앞에서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아침까지 술을 마셨을 때도
평소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았던 집사람의 눈물을 보았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오늘 저녁 중국집에서 혼자 마파두부밥을 먹는데
 tv에 나오는 노무현대통령의 영상을 보다가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들킬까봐 고개를 푹 숙이고 마파두부밥을 먹는데 눈물이 마파두부밥에 떨어졌다.
비비자.
그분 깨어진 뇌수에 흘린 눈물이다.


서울역 분향소에서


두 천사 photo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두 딸을 보니 첫째는 어느새 소녀가 되어있고 둘째는 몰라보게 기럭지가 길어졌다.
두 녀석 큰 병치레 없이 쑥쑥 잘 크는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적같은 축복이다.
감기에 잘 걸리고 걸핏하면 기침을 하는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서울밖으로 이사를 생각하고 있다.
창밖에 삭막한 빌딩숲 대신에 진짜 나무 숲이 있는 곳에 살고 싶고 시멘트가 아닌 진짜 땅을 밟을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첫째녀석 요즘 그림 그리기에 열심인데 토마스 기차와 자동차, 친구들과 엄마, 아빠, 하트구름과 바다가 등장한다.
동심의 솔직함에 웃음짓게 하는데 가끔 등장하는 이마트와 롯데마트가 아빠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딸에게 대형 마트 보다는동네 가게와 시장을 알게 해 주고 싶은데 현실에서는 쉽지가 않다. 더 늦기전에 아이의 그림에 나무와 동물과 벌레들이 좀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와 앉아서 카드를 만들었는데 겉에 그림을 그리고 안에 글씨는 엄마의 필치를 따라서 그리듯이 썼다.
그림 솜씨가 제법이어서 이녀석 나중에 그림 시켜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나도 역시 어쩔수 없는 화가아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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