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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돌돌

포토로그 2014 먼지의 날들





자화상 - 산수문화 Gallery

성석동

 

  성석동에 들어온지도 14년에 되었으니 짧지 않은 세월동안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 셈이다. 작업실을 오고 가면서 마주치는 풍경은 그동안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변해왔다. 그래도 도시의 변두리, 혹은 오래된 시골마을 같던 이곳은 언제부턴가 공장과 창고가 들어서더니 이제는 산을 깎고 논밭을 덮어 만든 시멘트 바닥위에 철제로 만든 가건물만 즐비한 동네가 되었다. 밤이면 사람들이 모두 퇴근해버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빈 동네인데 가끔 귀신을 보았는지 공장을 지키는 개들이 소란스레 짖어댄다.

 

  몇 해 전부터 이곳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화가가 가져야할 좋은 태도일거라 생각하기도 했었고, 작업이 잘 풀릴 때면 올빼미처럼 눈이 밝아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의 풍경들이 유독 선명하게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때마다 다음에 그릴 수 있겠지 하며 급한 그림의 뒤로 미뤄두곤 했었다.

성석동을 다시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나의 나이 듦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좋던 눈은 노안이 와서 안경을 의지하지 않고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신세가 되었고 예전보다 그림에 집중하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제 작년 어머니를 근처 요양원에 모시게 되면서 성석동은 작업실이 있는 곳에서 어머니가 계신 곳이 되었고 작업에 대한 부담감보다 어머니에 대한 형언하기 힘든 마음들이 더 무겁게 자리 잡은 곳이 되었다.

 

  이번 겨울엔 작업실을 오고가면서 죽어가는 많은 것들을 보았다. 연통 속에 둥치를 지었던 새가 질식해서 죽었고, 한파와 폭설을 맞고 풀들이 죽었고, 북쪽에서 날아와 겨울을 나던 오리는 트럭에 깔려 죽었다. 죽는 것은 생명체뿐만이 아니었다. 벽돌로 만든 집들이 헐렸고 급하게 지은 건물에 세들은 음식점은 금방 망하고 빈 건물이 되는가 하면 야밤에 펑 소리와 함께 공장 하나가 불타버리기도 했다. 그것들을 목격할 때마다 죽음의 가까움에 대해 생각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철거된 주택가에 홀로 남은 가옥, 오랫동안 쓰지 않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굴뚝, 똥을 치우지 않는 주인과 사는 개, 숲속에 떨어진 삐라속의 월북 노병, 그리고 새로 지은 물류창고들을 보았고 그것을 그렸다. 딱히 그것들을 선택하고 그린 논리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겨우 그릴만한 것들을 찾고, 힘들게 그려냈을 뿐이다.

 

  그림이라는 것은 어쨌든 과거의 살아있음에 대한 헌사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을 그리지 않고 죽()는 것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다만 이번 그림을 통해 죽음이란 것을 덜 우울하게 그리고 조금 더 오래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내가 난로를 피우는 바람에 집을 잃고 재를 뒤집어쓰고 죽은 참새를 옆에 두고 그렸다. 처음보다 눈이 움푹 더 패이고 야위긴 했지만 작업실의 한기 때문인지 아직 상하지 않았다. 봄이 되고 한기가 가시면 부패한 냄새가 나기 전에 어디엔가 묻어줘야겠다.

 

 















하얀 집, 한지에 목탄가루, 147x208cm, 2017




검은 집, 한지에 목탄가루, 147x208cm, 2018




디아스포라, 한지에 목탄가루, 147x208cm, 2018




정주, 한지에 목탄가루, 147x208cm, 2017




친구, 한지에 목탄가루, 147x208cm, 2018




눈안개, 한지에 목탄가루, 147x208cm, 2017





열섬 Gallery

Wise Society, 2017, 한지에 아크릴, 80×116.5㎝


열섬 Heat Island, 2017, 한지에 아크릴, 91×65㎝



완차이 하우스 Wanchai House, 2016, 한지에 아크릴, 150×105㎝



철조, Steel Bird, 2017, 한지에 아크릴, 65.5×51㎝



회로 Circuit , 2017, 한지에 아크릴, 72.5×53㎝



오너 하우스 Honour House, 2017, 한지에 아크릴, 149×209㎝



카프리오 맨션 Carprio Mansion, 2017, 한지에 아크릴, 160×130㎝



럭키 하우스 Lucky House, 2016, 한지에 아크릴, 210×148㎝



메이쿤 빌딩 Mei Koon Building, 2017, 한지에 아크릴, 53×72.5㎝



폭청 빌딩Ⅱ- Fok Cheong Building Ⅱ, 2017, 한지에 아크릴, 178×237㎝



폭청 빌딩 Fok Cheong Building, 2016, 한지에 아크릴, 210×296㎝



만퐁 인더스트리얼 빌딩 Man Foong Industrial Building, 2017, 한지에 아크릴, 130×194㎝


바콜로드 빌딩 Bacolod Building, 2016, 한지에 아크릴, 139×98㎝



동립 Winter House, 2016, 한지에 아크릴, 67×96㎝




 

상실의 시대, ‘그리기로 저항하기

 

심소미

독립큐레이터

 

 

1. 왜 다시 아파트인가?

정재호가 아파트 그림으로 돌아왔다. 전체적으로 화면을 채운 건물의 파사드는 전보다 복잡하고 세부적인 모습이다. 시선을 두자니 돌출된 공간에 넘쳐나는 사물들로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가까이서 본다면 시각적 압도감은 더하다. 세밀한 붓질은 파사드에 존재한 사물들을 일일이 드러내며, 보는 이의 시선을 끈질기게 화면에 붙든다. 표면의 얼룩은 물론이고 창문 밖 어지러이 뒤엉킨 전깃줄까지도 세부적으로 보여주는 그리기 때문이다.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대상이 눈앞으로 나타난 듯, 나의 신체가 공간을 마주한 듯 생생한 감흥에 빠져든다. 그런데 이 집념어린 화가의 노련한 필치에 마냥 감탄할 수만은 없다. 그가 대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강박적 그리기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재호는 오래된 아파트를 그려온 작가로 익히 알려져 왔다. 그가 2004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아파트는 파사드의 정면성과 치밀한 구조, 낡은 풍경을 삶의 풍부한 기념비로 다루며 시대적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이를 드러내는 방식에서도 여러 번 변화가 있었다. <청운시민아파트>(2004)에서는 실경의 구도로 건축물의 존재를 세우고, <오래된 아파트>(2005)에서는 정면 파사드로 다수의 삶을 펼쳐 보이거나 재개발 건물의 현존성을 거센 필치로 잡아내기도 하였다. 이후의 <황홀의 건축>(2007)에서는 아파트뿐만 아니라 근대건축물의 파사드를 상세히 다루기도 하였다. 아파트를 향한 그의 시선은 점차적으로 근현대 건축공간으로 이동하며, 근대성에 대한 누추함, 색 바랜 기념비에 대한 사유를 거리와 사물의 풍경으로 드러내 왔다. 그러던 그가 거의 십 년 만에 다시 아파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더 집요한 필치로, 그의 말대로라면 전보다 더 더디고 힘든 방법이다. 작가는 자신의 시간을 거스르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2. 열섬의 장소성, 홍콩의 아파트

 

사실 이번의 개인전 <열섬>은 아파트 그림 이후로 몰두한 근대성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2009<아버지의 날>부터 시작된 2011<혹성>, 2014<먼지의 날들>의 연장선상에서 정재호는 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을 밟게 된다. “모더니즘의 변형이 상이한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보고자 한 그는 홍콩에서 마주한 아파트에 압도되고 만다. 오랫동안 아파트를 관찰해온 그가 일찍이 이곳을 그림의 대상으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그가 홍콩으로의 발걸음을 이제야 옮긴 것은 이 시점에 그곳을 그려야만 하는 화가의 존재론적 상황이 담긴다. ‘오너 하우스’, ‘완차이 하우스’, ‘카프리오 맨션’, ‘폭청 빌딩’, ‘탑뷰 맨션’, ‘럭키 하우스’, ‘만퐁 인더스트리얼 빌딩등 홍콩의 철 지난 건물들이 <열섬>의 주인공이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낡고 오래된 아파트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볼륨의 맨션, 시멘트와 철 등 물성이 견고하게 드러난 모더니즘 건물도 포함한다. 홍콩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자신의 작업 초기부터 현재를 관통하는 집결된 근대성이다. 근대로부터 촉발된 도시에는 사람들을 담아내기 위한 육중한 집합 주거 건물이 도시마다 잔존한다. 이 집단적 건축 공간을 향한 작가의 시선을 일찍이 아파트가 대표해왔다. 홍콩의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과잉의 파사드를 바라보며 그가 마주한 것은, 바로 화가로서 지금껏 아파트에서 받은 감동이 무엇이었냐?”는 자기-회고적 질문이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그가 천착한 것은 존재하는 대상으로서 아파트를 다시-그리기이다.

 

홍콩의 좁은 땅덩어리를 채운 고층 아파트는 거대 자본의 축적과 신자유주의 금융 신화를 상징한다. 자본을 좇아 사람들이 몰리고, 정주하고자 하는 욕망이 좁은 땅에 집결되면서 고층 아파트와 거대 맨션이 도시 중심에도 쌓아 오르기 시작했다. 주로 50-70년대 세워진 아파트의 물리적 상태는 서울에서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곳곳에 금이 가고, 얼룩이 가득한 과거의 맨션들은 이제 홍콩의 역사적 파사드로 자리한다. 현재의 시간을 과시하는 건물은 매끈한 표면을 지닌 최근의 마천루이다. 실리콘 재질마냥 매끈한 신축 건물에서는 벽면에 녹아든 지저분한 얼룩과 노출된 전선더미 따위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표면의 배후로 과도하게 축적된 공간은 후끈한 열기를 내뿜는다. 도시에 들이닥친 인파를 피해 부유층은 언덕 꼭대기나 전망 좋은 위치에 자신들만의 낙원을 건설해 살아간다. 자본가는 숨 막히는 도시의 밀도로부터 금세 탈출해 버린다. 도시 안에서의 빼곡함은 이렇듯 비좁은 장소의 계급성을 지시한다. 좁고 틈 없는 장소일수록 신체와 신체가 서로 부딪히고, 질서가 허물어지고, 너저분한 삶의 파편들이 건물 밖으로 튀어나온다. 정재호가 시선을 둔 아파트의 파사드는 마스크를 벗겨낸 도시, 누적된 삶들이 터져 나오는 삶의 맨 얼굴이다.

<열섬(Heat Island)>으로 칭해진 이번 개인전은 후덥지근한 도시 홍콩에 집적된 삶의 열기를 내비친다. 전시에서의 한 작품이 전시와 동명의 제목을 지닌다. 어느 건물의 뒷면을 그린 그림인데, 녹이 슨 철제 프레임과 에어컨 환기팬이 눅눅하고 후끈한 도시의 공기를 전한다. 홍콩의 건물마다 줄줄이 달린 환기팬은 달궈진 도시의 열을 내부로는 식히고, 외부로 그 열을 방출하는 장치이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이 기계는 뜨거운 공기를 뱉어내며 도시의 후끈한 열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이 일으킨 열섬은 개별 아파트의 과열된 공간을 은유하면서 동시에 홍콩이라는 도시 전체를 연상시킨다. 흥미롭게도 작가가 부여한 명칭은 아파트의 기원으로 알려진 로마 시대의 한 주택 양식과도 공명한다. 이는 인술라(insula)’라 불리는 로마의 서민형 공동주택이다. 영문으로는 (island)’이란 뜻으로, 당시 사람들을 대거 수용코자 지은 자 주택의 폐쇄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연이었을까. 정재호가 열섬이라 부르는 이곳의 장소성은 먼 옛날의 시간까지도 거슬러 도시 생존의 역사를 암시한다.

3. 돌출된 파사드의 저항성

비좁은 열섬에서의 건물들은 서로 빈틈없이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사이에서 개별 건축물의 형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건물을 관찰하는 작가의 시선은 파사드 전체보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파악된 원근감에 주목하여 전개된다. 건물의 세부적 정보는 촬영한 사진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그리기에서 탐구된다. 화면을 마주한 작가는 사진의 정보를 무턱대고 맹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신체가 있었던 장소감을 바탕으로 사진에서 왜곡된 구도를 바로 잡으며, ‘거기 있어온 대상을 최대한 가깝게 살피고자 노력한다. 장소를 파악하는 그의 관점은 우선적으로 돌출된 파사드에 집중된다. 여기서 건물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파사드 구조 위에 덧대어진 무수한 흔적과 사물이다. 패턴 위에서 반복되는 차이들, 개별적인 사물들의 누적은 질서마저도 잠식하는 무질서를 화면에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그는 아파트의 유형적 형식에서 벗어난 어수선한 장면을 그리기로 옹호해 보인다. 그리기는 질서를 무질서로, 무질서를 질서로 전환하며 파사드에 삶의 생명력을 점차적으로 결집시킨다.

이러한 그리기는 작업 초기의 아파트 그림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한국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문화는 불과 몇 십 년 되지 않았으나, 벌써 새로운 디자인과 양식으로 교체되기를 요구받는다. 그러하기에 그가 주목한 옛 아파트는 낡고 방치되거나 쓸쓸하게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그림에서 묘사된 베란다에 쌓인 무질서한 사물이나 상이한 창문의 패턴, 난간의 모양새는 이러한 사라짐에 대한 작가의 저항적 의식이 담긴다. 서울의 아파트에서 관찰되던 이러한 개별적 특성은 홍콩의 아파트에서 더 극적으로, 더 누적된 삶의 장면으로 드러난다. 돌출된 파사드의 구성은 사실 좁은 공간을 확장하고자 한 거주의 욕망에서 비롯한다. 베란다 위를 샤시로 덮어 공간을 확장한 구조, 창밖으로 줄줄이 나열된 환기팬, 추가적인 난간 형태까지 건물은 더 이상 도면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의 건축 도면은 표면에 얹혀진 삶의 흔적들로부터 무수한 변형을 겪으며 새로운 파사드로 거듭난다. 이렇게 돌출된 입면은 최근의 아파트에서 병적이리만큼 기피하는 요소이다. 사이보그적인 광채로 위장한 건물은 자신의 표면 위로 어떠한 사적 개입이나 흔적도 용인하지 않는다. 베란다가 제거돼 온 근래 아파트 또한 이를 반증한다. 매끈한 표면으로 봉합된 최근의 아파트에 비춰본다면 오래된 파사드는 지저분하고, 보고 싶지 않은 너저분한 요소로 가득하다. 정재호의 그리기는 이 지점에서 더 집요하게 작동한다. 낡은 파사드에 존재하는 사소한 흔적과 미미한 사물을 일일이 그려냄으로써, 구차하다 치부되는 장면을 풍부한 삶의 의미로 전환시켜 보인다.

 

4. 그리기의 실천 : 대상을 밝히기

 

회화라는 시각적 감각이 어디까지 리얼리티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볼 때, 지금 정재호는 누추하고 허름하며 거부돼 온 대상들을 그리고자 하는 미학적 도전을 감행한다. 이는 그리기의 한계, 리얼리티를 선별하는 미적 굴레에 대한 한 화가의 반성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홍콩의 옛날 아파트는 원래 돌출된 구조에 수많은 것들이 더 끼어진 형태이다. 에어컨, 전선, 빨래까지도 계속 중첩되면서 안으로 숨기지 않고, 밖으로 드러내는 방식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대상을 향한 작가의 고백에서는 아파트의 돌출된 형태를 탐닉하는 애정 어린 시선이 담긴다. 파사드 위로 덧붙여진 철제 구조, 기계 부품, 환기팬, 전선, 파이프, 커튼, 심지어는 빨래와 속옷까지 상세히 그리며 그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거기 있는 대상의 현존이다. 이와 더불어 미세한 빛의 산포가 닿는 창문 너머의 공간, 시간을 암시하는 뜻밖의 그림자는 그의 신체가 현전했던 시간에 대한 깊은 회화적 연구로 탐구된다. 그림에서 파사드는 무수한 개별적 삶과 이것들이 이루는 삶의 총체를 보듬는 또 하나의 장소가 된다.

분명 정재호의 그리기는 옛 건물이 환기하는 노스텔지어적 감흥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는 허물어져 가는 현실에 대한 애잔함보다는 삶의 존재함을 집요한 그리기로 증명해 보인다. 이는 그가 동양화가로서 스스로 질문해온 존재론적 질문과 맞물린다. “화가는 장지의 섬유질 속으로 끝없이 스며들어 가는 대상을 붙잡기 위해 수십 번의 붓질을 반복한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의 표면에서 물감은 발견되지 않는다. 물감이 사라진 표면은 엄밀히 말해 여전히 종이이다.” 그가 감동받았던 어느 유화 작품을 곱씹으며 깨달은 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동양화의 존재이다. “물질성의 죽음을 재현하는 형식이라 그가 부연한 깨달음은 그리기로 회화의 형식을 극복해야만 하는 자신의 숙명적 상황을 고찰한다. 화면에 들어앉은 유령과의 지루한 싸움 끝에 그가 이번 작업에서 취한 태도는 대상을 최대한 정성 어린 모습으로 화면에 거주시키는것이다. 한 작업에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 가령 걸리는 노동집약적 그리기로부터 건물에 있던 얼룩, 먼지, , 습기, 눅눅함, 건조함, 물기, 그림자, , 어둠이 종이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세필을 들고 손의 중력을 조절하며 숨죽인 화가의 시간은 비물질적 대상까지도 종이에 차츰 거주시켜 나간다.

5. 장소를 회복하려는 그리기

정보와 속도의 사회인 오늘날 장소를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신체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다. “근대의 이동하기 쉬운 개인이 겪는 촉각의 위기에 대해 언급한 리차드 세넷(Richard Sennett)은 이동으로 인해 신체적 감각이 무뎌지는 현대인을 경고한 바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정재호의 그림은 거기 있던 대상을 일일이 화면으로 호명하는 방식으로 누적된 장소를 눈앞에 드러낸다. 글의 도입부에서 내가 의구심 어리게 질문한 그의 강박적 그리기는 이렇듯 장소성을 둘러싼 시대적 논의로부터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사물들을 과도하게 드러냄으로써 장소를 화면에 담아내는 그의 그리기에는 장소 없음”, “장소 상실의 시대에 대한 우려가 담긴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의 디테일은 눈앞에 드러남으로써 거기 있는 장소를 이곳으로 생생히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정재호의 그리기는 아파트라는 건조한 건축형태를 삶의 장소로 전환해 보이며, 무엇보다도 장소를 다시 세심히 관찰할 것을 권고한다.

 

정재호는 홍콩의 한 아파트(‘폭청 빌딩’)에 들어선 순간에 대해, “협곡 속에 들어간 느낌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그 경험은 신체적 현존을 광활한 자연 속 인간마냥 건축 공간 안에 응축한다. 각박한 현대건축에 익숙해진 신체가 사물들이 돌출된 세계에 도달했을 때, 그는 상대적으로 무감각해진 대도시 속 신체를 체감했을 것이다. 그가 느낀 공간에서의 비현실적 감흥은 도시에서 누적돼 온 인간의 자연성, 일종의 원시성과 맞닿는다. 이쯤에서 유형학적으로 부여된 아파트의 특권적 의미는 개별적 대상이 집적된 무시무시한 발화(파롤)로부터 붕괴된다. 이를 실천하는 그의 강박적 그리기는 도시가 집단적으로 배열, 패턴, 규정하려는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삶의 저항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리기로서 도달한 장소의 저항적 힘은 <아버지의 날>에서 드러난 폐허로서의 근대성, 유령과 같은 기념비에 맞서는 생명력을 지닌다. 작가는 장소 상실을 앓고 있는 동시대인의 시선을 그림의 파사드로, 존재하고 있는 장소로 이끌면서 망각에 꿋꿋이 저항하고자 한다. 이는 상실의 시대가 압도한 현실에 맞서, 인간이 누적해 온 공동의 감각을 회복하고자 한 화가의 간절한 열망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그리기는 이토록 지독하게 동시대성을 발언해 보인다.

 

 

 

 



 

 

 



겨울의 안개 photo



겨울의 안개

작업실에서 나와보니 어제 온 눈이 밤 사이 습한 안개로 변해 있었다. 집으로 향하면서 익숙한 풍경이 안개속에서 변한것을 보았다.
안개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멀게 만들고 먼 곳에 있는 것을 더 멀리 밀어낸다. 안개속에 있는 풍경은 그래서 평소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성석동에 온 뒤로 이 곳의 풍경을 지겹도록 보았지만 계절이 부리는 마술적인 변화는 불현듯 낯설은 풍경을 내어놓기도 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올해도 이곳의 풍경을 그리지 못했다. 몇 해 전부터 다른 곳이 아닌 이곳을(화가니까)그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자문했었는데 그동안 전혀 그리지 못한 까닭을 모르겠다. 풍경을 그리게 하는 것은 풍경을 찍는것과는 매우 달라서 저 바깥에 있는 그릴만한 것이라는 사실로는 부족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불필요한 무엇을 버려야 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는데 그 불필요한것 또한 그림을 그리면서, 그것도 꽤 오랜 시간동안 그리면서 알게 될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역시 사진만 바라보다가 망연히 아침을 맞았다. 이 사진을 찍은 날부터도 몇 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붓을 대지 못했다.

요즘 나는 이상한 하루의 리듬속에서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작업을 하던 패턴은 올해따라 유난히 습한 겨울공기 때문에 망가지고 말았다. 오늘은 그릴 수 있으려나.

개인전


개인전


최민화 창고

최민화의 전시를 보았다.
전시가 열리는 합정지구라는 곳은 번화한 홍대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그 느낌은 남루한 곳이다. 세월을 이삼십년 후퇴한 듯한 합정동의 골목길에 마치 양품점의 쇼윈도우같은 디스플레이를 갖추고 있는 방 한 칸 정도의 공간이다. 최민화정도의 활동을 한 작가라면 삐가번쩍한 화이트큐브에 그림이 걸려야 할테지만 한국미술계는 여러가지 이유로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합정지구같은 변두리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삶 속에 푹 박혀 있는듯한 공간에 그림이 걸리는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것도 한국미술의 지극히 당연한 풍경이 되었다.
최민화의 그림을 본 것은 아마 대학때였던것 같다. 그때도 최민화는 분홍색 배경에서 부랑하고 있는 청년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 그림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이십여년이 흐르는 동안 최민화의 그림을 간간히 보았는데 그리 큰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고 때로는 이 작가가 이렇게 사라져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만큼 실망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미술계가 덩치가 커지면서 전보다 많이 팔리고 더 화려해지고 더 많은 수사로 치장되는 시기였던 것 같다. 지난 일요일 최민화의 전시를 보았을때도 그림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슷한 소재를 비슷한 테크닉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몇십년동안 회화를 했으면 그림이 달라졌을법도 한데 내 눈에는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 빠른 세상에 이렇게 느린 그림을 느리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버려진 공터에서 소주를 마시고 기타를 치면서 분홍색 취기에 절은 청년들이 그대로 중년의 어른이 되었고 그 배경은 공터가 아니라 서울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이 그림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새로운 미학이 여기 있어서 이 작가의 회화가 여전히 지금도 어떤 성취를 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 그림을 봐야한 한다고 말할수 있을까?
최민화의 전시를 본 일주일 후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리는 '언더마이스킨'이라는 전시를 보았다. 대기업이 만든 화이트 큐브공간, 중앙에는 서도호의 작품이 영구설치되어있는. 합정지구라는 공간이 강북의 어떤 비장함을 품는다면 하이트컬렉션이라는 공간은 강남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공간일 것이다. 한시간 남짓 전시를 보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우선은 나 자신이 어떤 작업에도 몰입하지 못하고 있었고 영어화 일본어에 밀려 제2외국어 신세가 된 듯한 한국어 대사, 자막, 텍스트마저도 해독하기 힘들었다. 몰입이 힘든 이유는 결정적으로는 작업들에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 작업들은 글로벌하고 노마드하고 무정형적이가 하면 지극히 사적이기도 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듯한 느낌. 흩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전시장의 성격과 작업들의 디스플레이 방식, 그리고 관객들의 옷차림이 만들어내는 묘한 위화감일 것이다. 다시 최민화의 전시로 돌아와서 얘기해보자면 최민화의 그림과 전시장이 만들어내는 어떤 리얼리티같은 것이 하이트컬렉션의 전시를 통해서 역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판은 전보다 복잡해졌고 그것이 뭐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스펙트럼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래도 하나의 진실을 꺼낼 수 있다면 점점 더 자본주의적이 된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미술이 자본화 된다는 것은 상품처럼 된다는 것이다. 백화점의 공간이 과거를 밀어내는 늘 새로움의 신화로 단장하는 공간이라면 지금의 기업의 화이트큐브로 대변되는 미술판은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 몰역사적 공간이다. 새로운 미학을 존재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품으로서 미학을,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상품 속에는 역사성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최민화의 작업같이 삶이, 역사가 손톰에 낀 때처럼 묻어있는 작업은 화이트큐브 같은 공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림미술관이나 여타의 상업적인 화이트큐브 공간이 보여주는 감각은 아마 '소유하고 싶은 미래'라는 감각일 것이다. 거기에는 역사없음과 공간없음 시간없음이라는 감각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간에서 위화감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관객 각자의 현재성에 있을 것이다. 공간이 더 상업적이건 아니건, 고급미술을 지향하건 아니건 간에 거기서 작동하는 권력의 관계는 다르지 않다.
최민화의 그림은 '소유하고 싶은 미래'라는 감각과는 정 반대의 감각을 보여준다. 그건 아마 삶의 실패를 겪은 자의 이마에 패인 주름살 같은 것일 게다. 최민화는 현실에서 부랑하는 청년들을 그린 이레 여전히 그 부랑의 모습을 조금씩 업그레이드하며 그리고 있다. 그건 그가 느끼는 현실이 본질적으론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겠고 여전히 그걸 그리는 것만이 여기서의 진실이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 작가가 오랫동안 하나의 주제를 버리지 않고 그리고 있다면 그것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동안 최민화의 그림에 대해서 그것을 말하고 묻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최민화의 전시는 젊은 기획자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합정지구라는 신생공간과 젊은 기획자, 그리고 최민화라는 조합은 어떤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것은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삶이 기성의 미술계가 만들어낸 소유할 수 없는 미래를 더이상 쫒지 않겠다는 것이겠고 다른 아버지를, 선생을 발견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리는 잡음들. 단색화, 위작논란, 조영남등. 역시 문제는 기성세대들이다. 


청춘 Gallery

이 그림의 원본은 70년대 후반 장발족 단속에 걸려 바리깡질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을 담은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과 과학기술진흥정책의 파도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이들은 요철발명왕을 읽고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에서 부록으로 주는 조악한 장난감을 수집하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막 청년이 되어 세상에 나왔을때 맞닥뜨린 것은 밝은 미래가 아니라 정신과 신체를 억압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다. 70년대 말 학번인 나의 큰형은 전공인 수의학에는 관심없이 방에 틀어박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페를 혹사하며 담배를 폈는데 아버지는 그런 큰형과 내내 불화하며 볼온서적을 불태우고 기타를 던져버렸었다. 큰형에게 있어 사회의 아버지와 집의 아버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겨우 수의사 자격시험을 통과한 형은 대관령 목장과 제약회사등을 다니다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고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중년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형과 아버지의 슬픔은 단지 가족의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형은 형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터이다. 시대의 비극은 그렇게 가족의 슬픔을 만들어내었다.
장발족 단속이 있은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세상은 조금도 나아진것 같지 않다. 우주왕복을 하고 중력파를 발견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청년들의 머리에는 멍청한 헬멧이 씌워져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주가 더 깊고 멀어진 만큼 우주는 더 멀리 달아난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의 원본은 70년대 후반 장발족 단속에 걸려 바리깡질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을 담은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과 과학기술진흥정책의 파도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이들은 요철발명왕을 읽고 소년중앙과 어깨동무에서 부록으로 주는 조악한 장난감을 수집하면서 자신들의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막 청년이 되어 세상에 나왔을때 맞닥뜨린 것은 밝은 미래가 아니라 정신과 신체를 억압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다. 70년대 말 학번인 나의 큰형은 전공인 수의학에는 관심없이 방에 틀어박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페를 혹사하며 담배를 폈는데 아버지는 그런 큰형과 내내 불화하며 볼온서적을 불태우고 기타를 던져버렸었다. 큰형에게 있어 사회의 아버지와 집의 아버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겨우 수의사 자격시험을 통과한 형은 대관령 목장과 제약회사등을 다니다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고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중년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형과 아버지의 슬픔은 단지 가족의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형은 형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터이다. 시대의 비극은 그렇게 가족의 슬픔을 만들어내었다.
장발족 단속이 있은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세상은 조금도 나아진것 같지 않다. 우주왕복을 하고 중력파를 발견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청년들의 머리에는 멍청한 헬멧이 씌워져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주가 더 깊고 멀어진 만큼 우주는 더 멀리 달아난지도 모르겠다.'

4월 25일의 작업실 작업중

긴 여행을 다녀오고 다시 작업을 시작한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처음에 잡히지 않던 붓이 이제는 점점 익숙하게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그리던 것을 그리고 있지만 전보다 더 더디고 힘든 방법으로 그리고 있다.
날이 갈수록 눈은 어두워지는데 아이러니하게 그림은 더 밝은 눈을 요구한다.
어디론가 가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그린다.

전시소식 창고

SWEET MY HOME




김서율_민경숙_이주은_정재호展
  

2016_0331 ▶

 2016_0424


응시_한지에 아크릴채색_74×94cm_2016

초대일시 / 2016_033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2014. 갤러리 현대 <먼지의 날들> 월간미술 리뷰 평론



정재호  __  먼지의 날들

갤러리 현대 5.30~6.22

최근 새롭게 행동주의미술이 주목받으며 미술가들이 사회, 정치, 경제분야를 두고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행동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 매체를 사용하는 미술은 낡은 것이며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우리는 세계 미술사에 남을 ‘민중미술’ 전통을 지니고 있고 그 의의와 영향력은 여전히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를 거치며 겪은 ‘단절’ 이래 사회·역사적 이슈를 담은 작업은 일면 진부한 듯 여겨져 그 내용은 뒤로 밀리고 작가의 이름이 작업을 덮어버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재호의 회화 업은 행동주의미술과 민중미술적 태도와 닿아 있다. 허물어져버린 오래된 아파트와 건물들의 정면을 몸으로 기억하려는 듯 세밀하게 묘사한 일련의 작업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사물의 현재를 기록하는 안간힘을 보여줬다. 커다란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건물 창은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고, 그 창을 사용했던 개개인들의 삶을 환기하게 만든다. 결국 오래된 건물을 화면으로 옮기는 작업은 오랜 시간 그곳을 장소로서 사용했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정재호는 그리는 행위를 통해 온전히 체화하며 구체적 실존을 화면에 옮기는 시도인 것이다.
이렇듯 건물 파사드를 다룬 인상적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가 ‘먼지의 날들’이라는 제목으로 사물과 인물, 상황 등을 그린 작업을 전시했다. 그가 그린 것들은 불이 붙은 채 덩그러니 놓인 타자기, 무채색의 카메라, 종점에 모인 전차들, 공항으로 쓰였던 황량한 들판에 놓인 프로펠러 비행기, 오래된 텔레비전, 그레이하운드 버스, 우주선과 외계 행성에서 헬멧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소변을 보는 듯한 남자들, 영화 포스터에 나올 법한 여인의 초상,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를 지녔던 인천 선인체육관 등 대부분 1960~1970년대의 흔적을 담은 것들이다. 화재로 연기가 오르는 홀리데이호텔 이미지와 버려진 차들,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 단지 내 풀이 무성한 공터에 놓인 미끄럼틀과 시소 등은 모두 빛바랜 과거의 이미지다. 전시 서문을 쓴 정현은 “정재호에게 과거의 호출은 추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워지거나 잊혀진 기억의 잔해들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해 재현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과거 개발 시대 선진적 삶의 상징이었던 대상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해 정재호는 그리기라는 신체적, 물리적 활동을 매개로 대상을 기억하고 다시금 제시한다. 다시 말해 과거 대상에 대한 ‘그리기’는 ‘기억하기’라는 행동과 다름 없으며, 스스로 기억한 대상을 회화의 형식을 통해 재제시(re-presentation)하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객들은 그가 겨우 붓끝으로 잡아놓은 빛바랜 이미지들의 마법에 기꺼이 빠져든다. 바스러질 듯한 무채색 화면으로 섬광 같은 공감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정재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를 담지한 과거의 사물 이미지는 전시장을 나선 후 위력을 발휘한다. 마주치는 도심의 마천루와 거리는 주술에 걸린 듯 지상으로부터 몇 미터 떠 있는 듯하다. 선인체육관이 ‘먼지처럼’ 사라졌듯 우리를 둘러싼 단단한 현재와 사물들도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닐까. 이것이 미래를 주장하는 장밋빛 수사들의 속임수와 ‘현실’을 둘러싼 장막이 폭로되는 순간이라면 이토록 견결한 행동주의가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서준호・스페이스 오뉴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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